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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리뷰 (흑백, 여성서사, 사회비판)

by hwangwebsite 2025. 10. 29.

흑백 바닷가에서 젖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주인공 클레오를 감싸 안고 있다. 모두가 서로 껴안은 채 감정적으로 깊이 연결된 모습이며, 포스터 상단에는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로고가 있고, 하단에는 영화 제목 '로마'가 굵은 노란 글씨로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각본·연출 '알폰소 쿠아론', 개봉일 '12월 12일 일부 극장 상영', '12월 14일 NETFLIX 공개' 안내 문구가 적혀 있다.
영화 '로마' 포스터

<로마(Roma, 2018)>는 멕시코 출신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흑백영화로,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한 중산층 가정과 가정부 ‘클레오’의 시선을 통해 여성, 계급, 사회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시적 영상미와 정적인 연출이 돋보이며, 평범한 일상 속에 담긴 감정과 시대의 흐름을 탁월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흑백영화로 전하는 기억과 현실의 경계

<로마>가 관객에게 처음 강하게 각인되는 지점은 바로 흑백영화라는 형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컬러가 주는 시각적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의 관객에게 흑백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면서도, 감정과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에서 흑백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기억의 장치이자 감독의 감정적 시선입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사도우미 클레오와의 관계, 그리고 당시 멕시코 사회의 혼란을 회고하며, 흑백 영상으로 모든 것을 정제해냅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에게 '관조'의 태도를 유도합니다. 극적인 음악도, 빠른 편집도 없습니다. 대신 카메라는 공간을 천천히 훑고, 인물의 작은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는 우리가 보통 영화에서 기대하는 '흥미진진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영화가 끝난 뒤 깊은 감정의 잔상을 남깁니다. 특히 비가 오는 날 거리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나, 병원에서의 혼란 속 침묵처럼,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순간들은 이 흑백 톤이 주는 순수함 덕분에 더욱 강하게 다가옵니다.

감독 본인이 직접 촬영까지 맡은 이 작품은, 프레임 하나하나가 사진처럼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영화적 회상록’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유이며, 흑백이라는 제한 속에서 빛과 그림자의 구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연출되어 인물의 내면과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로마>의 흑백은 단순히 옛날 감성을 자극하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과 현실 사이의 틈을 메우는 정서적 필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서사, 가정의 중심이 되다

<로마>는 명백히 여성의 시선과 서사를 중심에 둔 영화입니다. 주인공 클레오는 원래 이름보다도 더 익숙하지 않은 존재였던, 가정의 뒤편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가사도우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녀를 카메라의 중심에 세우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의 삶과 감정을 집중 조명합니다. 클레오는 단순한 '도우미'가 아니라, 가족의 중심이자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클레오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여성, 원주민, 가난한 계층, 비정규 노동자. 그러나 <로마>는 그녀를 동정하거나 과장된 영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클레오의 행동 속에 진짜 강인함과 모성, 희생, 그리고 자기존중의 서사를 담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에게 버림받고, 임신과 유산을 겪으며,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딥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에서도 클레오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성 서사의 중심에는 공감 가능한 감정의 층위가 자리합니다. 특히 여성 관객에게는, 타인의 집에서 ‘가족보다 가족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클레오의 삶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멕시코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며, 전 세계 수많은 여성들이 겪는 보이지 않는 노동, 감정적 헌신, 사회적 고립 등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여성의 현실을 들추며, 조용하지만 강력한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혼란한 멕시코 사회의 단면과 계급구조

<로마>는 한 여성의 삶을 다루는 영화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1970년대 멕시코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 혼란과 계급 갈등의 구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멕시코시티, 겉으로 보기엔 중산층 가정의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는 듯하지만, 화면 속 세밀한 요소들은 당시 사회의 불안정성과 빈부격차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특히 가사도우미 클레오의 삶과 그녀가 속한 공간은 멕시코 사회 내부에 존재했던 계급 간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속 집안 구조만 보더라도 계급의 구분은 명확합니다. 가족이 사는 넓은 거실, 고급 가구로 꾸며진 침실은 중산층의 안락함을 보여주는 반면, 클레오가 머무는 다락방은 좁고 기능적인 공간에 불과합니다. 주방과 세탁실은 그녀의 일터이자 사적 공간과 이어져 있고, 그 공간은 계단 아래나 옥상 등 ‘가시적이지 않은’ 영역에 배치됩니다. 이는 그녀의 존재가 집안의 중심이 아닌 ‘경계선’에 위치해 있음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가족 구성원은 클레오를 신뢰하고 의지하면서도, 철저히 사용자와 피고용인의 관계로 선을 긋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거리감은 식사 장면, 말투, 시선처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아이들이 클레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면서도, 식사 자리는 항상 분리되어 있고, 중요한 가족 대화에서 그녀는 배제되곤 합니다. 이는 당시 멕시코 사회에서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겪던 구조적 소외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정치적 맥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화 중후반에 등장하는 1971년 코르푸스 크리스티 학살 사건 장면은 이러한 사회 구조적 불안정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클레오가 출산용품을 사러 간 상점은 시위로 인해 혼란에 휩싸이고, 민병대가 무장한 채 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 학살은 실제 멕시코 정부가 시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불법적인 무력을 사용한 사건이며, 영화는 이를 클레오의 시선으로 재현함으로써 개인의 일상과 국가적 폭력이 교차하는 지점을 탁월하게 포착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러한 비극적 사건을 과장하거나 감정적으로 몰아가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는 점입니다. 클레오는 시위와 총격 속에서도 무력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고, 이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그녀의 개인적 비극 — 아이의 사산 — 과 역사적 비극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면서, 관객에게 이 두 고통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로마>는 이처럼 사회구조를 명확히 고발하지 않으면서도, 공간 배치, 인물 간 거리, 사건의 배경 등을 통해 멕시코의 불평등 구조와 권력의 위계를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흑백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현실을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여주며, 클레오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은 멕시코 사회 전체의 계층적 모순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는 단지 멕시코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회적 구조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로 읽힐 수 있습니다.

결론: 조용하지만 강력한 이야기의 힘

<로마>는 거창한 서사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영화입니다. 흑백 영상과 정적인 연출, 여성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선, 멕시코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디테일은 모두 이 영화가 단순한 예술영화를 넘어 현대 사회의 거울이자 진심어린 회상록임을 증명합니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여운이 남는 <로마>는 단연코 오래 기억될 작품입니다.